MIDBARR

아들과 돌

mimnesko 2023. 3. 17. 19:23
마태복음 21:33~46

33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꿈의 해석'이라는 책이 나오기 전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꿈'은 늘 신비의 영역에 있었습니다. 어떤 꿈은 깨어나서도 좀처럼 잊혀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때론 꿈에서 봤던 어떤 곳을 현실에서 마주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기시감(deja vu)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에서도 꿈을 해석하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왕이 꾼 꿈을 해석하여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던 요셉이 대표적입니다. 

 

또 어떤 왕은 불길한 꿈을 꾸고 신하들에게 그 꿈의 해석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왕이 정작 자신이 꾼 꿈의 내용은 신하들에게 이야기해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정말 '신통한' 능력을 가졌다면 꿈의 해석뿐 아니라 왕이 말하지 않은 꿈의 내용까지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왕에게 그런 의도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왕의 요청은 단호합니다. 그 때 한 사람이 놀랍게도 왕의 꿈을 설명하고 해석하기까지 합니다. 

 

"왕은 꿈에서 거대한 조각상을 하나 보았습니다. 머리는 금으로 되어 있고, 가슴과 팔은 은, 배와 넓적다리는 청동, 무릎 아래로는 쇠, 그리고 발은 진흙이 혼합되어 있는 거대한 조각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돌 하나가 나타나더니 쇠와 진흙으로 된 발을 쳐서 부쉈고 그러자 이내 조각상 전체가 무너지며 산산조각이 나는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돌은 이내 거대한 산이 되어 온 세상을 가득 채웠습니다."

 

톰 라이트는 자신의 책에서 이 부분을 아래와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나라는 금, 은, 동, 쇠로 된 나라들이다.(이 꿈을 꾼 왕은 마침 황금기를 지배하던 왕이었다) 각각의 나라들은 자기 이전의 나라만큼 영광스럽지 못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 세상이 더 나아진다고 믿기보다 나빠진다고 믿었다. 마지막에는 마치 쇠와 진흙이 섞인 것처럼 부서지기 쉬운 나라가 올 것이다. 그러고 나서, 전혀 다른 것이 나타날 것이다. 한 '돌'이 발을 부서뜨릴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돌이 마지막 나라를 파괴한다는 뜻이다. 비틀거리며 서 있던 이 세상 제국이 모두 와르르 무너질 것이다. 돌은 자라서 산이 될 것이다. 새로운 방식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는 새로운 나라가 될 것이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을 '쇠와 진흙'으로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돌'이 나타날 차례가 된 것입니다. 그 돌이 로마 제국를 산산히 부숴버릴 것이라는 기대가 오래 전부터 유대 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돌'은 틀림없이 '메시아'일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속에 등장하는 한 '돌'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즉각 다니엘서의 한 '돌'을 떠올리게 했을 것입니다. 그 돌은 시편118편의 인용과 같이 '건축자의 버린 돌'이었고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나게 했습니다. 문제는 그 '돌'에 맞아 부숴저야 하는 대상이 로마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을 향해 '바로 너희들이 부숴져야 할 발이다'라고 선포하신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포도원의 농부들이 죽였던 그 '아들'과 건축자들의 버린 '돌'은 모두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흥미롭게도 아들을 뜻하는 히브리어 '벤(ben)' 은 돌을 뜻하는 히브리어 '에벤(eben)'과 매우 흡사합니다. 적어도 예수님이 포도원의 농부들에게 죽임을 당한 그 '아들'을 이야기하신 후에 갑자기 건축자의 버린 '돌'을 이야기했을 때, 그 자리에 둘러 있던 유대인들은 모두 눈치를 챘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손에 장차 죽임을 당할 그 아들이 바로 메시아구나. 그 분이 모든 세상을 부숴뜨리는 '돌'이시구나. 그리고 바로 그 메시아, 아들, 돌이 내 눈 앞에 계신 바로 이 분, 예수님이시구나.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의 반응은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자신들의 검은 속내를 들킨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잡으려'했습니다. 마치 포도원의 농부들처럼 말입니다. 마지막까지 회개의 가능성을 닫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눈에, 그들의 당황과 분노, 질투와 성냄은 안타까움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아들을 죽이며 마침내 주인이 올 것이라는 비유는 그들의 귀에 전혀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어떤 낭만적인 기대가 전혀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입지를 강화하거나 나의 정치적인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다시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상식과 얄팍한 기대, 검은 속내를 모두 부수어 가루로 만들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신학자 몰트만의 지적처럼 그러므로 오시는 하나님은 '두려움'의 하나님입니다. 더불어 그 날은 꼭꼭 감춰왔던 우리의 속내가 백일하에 드러나는 날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종교적인 기독교'는 그 날은 어떤 '신비의 대상'으로 감추려고 노력합니다. 그 날의 '공포'는 그대로 강조하면서 마치 전혀 도달하지 않을 것처럼 말하거나, 그 나라에서 받을 상급을 지금 이곳에서 '현금'으로 구입할 것을 종용합니다. 

 

그러나 그 날이 오면 돌 하나가 떨어져 모든 것을 가루로 부숴낼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것은 희망입니까, 아니면 저주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