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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하시는 이상한 일

mimnesko 2023. 3. 15. 11:05
마태복음 21:12~22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옛날 중국에 태항산(太行山)과 왕옥산(王屋山)이라는 두 개의 큰 산이 있었습니다. 그 기슭에 우공(愚公)이라는 구십 세에 가까운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 가족은 집 앞을 가로막은 두 산 덕분에 외부로 드나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우공은 자녀들을 불러모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는 너희들과 함께 저 두 산을 헐어, 상주(象州)와 한수(漢水)에 이르는 길을 내려 한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하냐?" 

자녀들은 모두 우공의 의견에 찬성하였고 이내 산을 파기 시작합니다. 무더운 여름에도 추운 겨울에도 그들의 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날 근처를 지나던 지수(智叟)라는 노인이 이 장면을 보고 말합니다. "우공, 이건 무모한 일입니다. 연세도 많으신 분이 무슨 기력으로 이 일을 하십니까?" 우공이 대답했습니다. "저야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나, 내가 죽으면 내 아들들이, 또 그 아들들이 대를 이어 이 일을 하려고 합니다. 두 산이 더 자랄 일이야 없을테니, 우리가 대를 이어 흙을 덜어낸다면 언젠가는 그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우공의 일을 산과 바다의 신이 알게 되었고 이를 옥황상제에게 고했습니다. 옥황상제는 우공의 결심과 행동에 크게 감명을 받아 힘장수 신을 보내어 태행산과 왕옥산을 옮기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두 산이, 하나는 삭동(朔東)에 다른 하나는 옹남(雍南)에 놓였다고 합니다.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기록된 이 우화에서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우공이라는 노인의 결심처럼 어려움을 무릎쓰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그게 큰 산이라고 할지라도 옮길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논어 자한편에는 비슷한 표현으로 '위산일궤(爲山一簣)'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역시 산을 세우는 일이라도 삼태기 하나의 흙에 달려 있고 땅을 평평하게 하는 일조차 삼태기 하나의 흙을 덜어내는 것부터 시작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위기가 거론될 때마다 저마다의 의견이 난무합니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을 지난 후 한국 개신교의 신뢰도는 선교 이후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장 전도와 선교라는 교회의 임무에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미디어에서조차 개신교를 '거대한 부정 집단'으로 묘사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습니다. 개신교 전반의 변화와 개혁이 요구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변화와 개혁을 말하는 대부분 이야기들이 '거대담론'으로 흐를 때가 많습니다. 천주교나 성공회처럼 명확한 관리주체가 존재하는 교파가 아니라면 엄두도 낼 수 없는 일들이 '대책'으로 거론될 때도 많습니다. 보다 건강하고 거룩한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민족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감당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는 구호는 요란하지만 그 어디에도 '어떻게'라는 각론이 존재하질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모두 같은 '목표'를 향한다고는 하지만 그 이면에는 조금씩 초점이 다른 목표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내에 '우공이산'의 우직함이 모자란 것이 아닙니다. 많은 성도님들은 그 어떤 시련과 고난이 있더라도 묵묵히 한 삽의 흙을 떠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내 생전에는 이루지 못할 일이어도 좋다, 내 자녀들이 이어가면 된다, 라는 결의와 각오도 충분합니다. 

 

오히려 한국교회에 부족한 것은 "과연 우리가 덜어내야 할 산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코로나 이후 교회의 정상화를 '성도의 회복'으로 보는 번영주의적 시각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코로나가 바꾼 새로운 일상, 즉 뉴노멀의 삶을 전세계가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과거 중대형 교회 목회자들은 코로나 이전으로 성도 수가 회복되고 교회의 습관이 회복되는 것을 '노멀'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방법이 검증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휴대전화가 일상화 된 삶을 살고 있는데도, 나는 유선전화만을 신뢰하겠다고 공중전회를 고집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들이 지금 한국교회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

 

예수님은 성전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는 것으로 한 삽의 흙을 떠내셨습니다. 그것이 '한 삼태기의 흙'에 불과하다는 것을 예수님이 모르실 리 없습니다. 성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이상한 일'로 여겼습니다.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미 오랜 관행과 습관으로 익숙해진 그들에게 "성전에서 드리는 예물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차라리 기행을 보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이, 그 제자의 제자들이 대대로 그 흙을 덜어내어 주길 바라셨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한국교회에 지금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적 없는 교회의 부산물들을 치워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교회 공동체의 진정한 목적을 떠나 마치 쓸모없는 외투처럼 걸치고 있던 것을 벗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907년 평향대부흥의 시작은 목회자와 선교사의 통렬한 자기비판으로부터였습니다. 잘못된 현상과 결과가 있음에도 여전히 반성할 줄 모르는 한국의 목회자들이 마음 깊이 돌이켜봐야할 역사의 단초가 아닐까요. 한 삽의 흙으로 산을 옮기려 했던 우공의 우직함이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