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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쓰시겠다 하라

mimnesko 2023. 3. 14. 10:42
마태복음 21:1~11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 신이 배신한 사람들'가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JMS(정명석), 오대양(박순자), 아가월드(김기순), 만민중앙교회(이재록), 이렇게 네 명의 사이비 교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에게는 익숙치 않은 이름일지 모르나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이단'이라는 꼬리표로 들어보았던 이름들입니다. 

 

ChatGPT에 '나는 신이다'라는 질문을 던져 보았더니 흥미로운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주장입니다. 인간이 신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한계가 있으며, 모든 것을 알지도, 모든 것을 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자연 법칙과 물리 법칙에 따라 살아가며, 다른 인간과 함께 사는 사회적 동물입니다. 따라서, 신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능력과 특성을 가져야 합니다.

 

신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능력과 특성을 가져야' 한다는 대목이 눈에 띕니다. 이 네 명의 사이비 교주들의 특징을 이 문장보다 더 잘 요약한 문장이 있을까요? 이들은 하나 같이 자신들이 가진 능력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비범한 특성이 있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스스로 메시아, 혹은 하나님의 영을 품은 그릇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어떤 '능력과 특성'을 보여준 적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불가해함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들이 신 또는 그 대리자라는 증거, 즉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능력과 특성을 보여준 바도 없이 어떻게 이들은 '신'의 행세를 할 수 있었는가? 또 이들을 추종하는 소위 공부 깨나 했다는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이 사이비들을 추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안타깝게도 위의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그 대답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선정적이고 참담한 현실과 카메라 너머 냉소적인 조롱만이 있을 뿐입니다. 여전히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라는 사이비가 큰 교세를 이루고 있는 한국 사회에 어떠한 면역작용도 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음습하게 숨겨졌던 것들이 어떻게든 공론의 장으로 올라왔다는 점에서는 나름의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지요(이 부분은 리뷰를 따로 작성해볼 요량입니다). 

 

***

오늘 본문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귀와 나귀 새끼'를 가져올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당연히 나귀와 나귀 새끼의 주인의 반발이 예상되는 장면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사이비 교주들이 교묘하게 사용하는 성경 구절이 바로 이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사이비 교주들은 본인들이 하나님의 권능과 메시아의 힘을 가졌으니 본인들이 사용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주가 쓰시는 것'이라고 사람들을 세뇌하는 것입니다. 그 무엇이든 '주가 쓰시겠다'는 명분 아래에서는 허용되고 허락된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본문에는 그런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귀와 나귀 새끼를 빌렸던 것의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그 긴 여정의 끝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였습니다. 개인의 처참한 실패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의 승리였습니다. 이 땅에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자신의 성에 입성하는 장면은 아무리 좋게 묘사하더라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던 바로 그 사람들의 손에 잔인하게 살해당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예수님은 그 마지막을 이미 알고 계셨다는 점입니다. 자신을 환영하던 사람들 손에 이끌려 골고다로 내던져질 것이라는 것, 자신을 환호하던 입술이 저주를 내뱉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참담하게도 자신의 십자가 위해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모욕적인 팻말이 걸리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나귀와 나귀 새끼는 그 고통의 길의 시작점이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의 성취였습니다. 

 

반면 사이비가 추구하는 '주가 쓰시는 것'들은 모두 자신들의 풍족함, 풍요로움을 위한 것입니다. 나를 위한 전체의 희생, 나를 위한 모두의 헌신, 나를 위한 모두의 맹목적인 믿음. 이 모든 것들이 비(非)복음입니다. 오늘 성경 속 예수님의 삶은 전체를 위한 나의 희생, 모두를 위한 나의 헌신, 모두를 향한 나의 끝 없는 신뢰였습니다. 때문에 사이비 교주들을 '기독교의 유사 종교'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모욕감이 듭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의 연약함 삶 역시 종려나무를 흔들며 내 자신의 문제만을 외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마음도 가득합니다.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예수님을 믿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