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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하고 음란한 세대

mimnesko 2023. 2. 21. 11:18
- 마태복음 12:38~50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 412~323 B.C)는 평생 금욕적인 생활을 추구하며 단벌의 옷만 가졌고, 집이 아닌 굴러가는 통 속에서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최소한의 삶만을 영위했던 디오게네스가 아마도 최초의 '미니멀리스트'가 아니었을까요? 이런 디오게네스가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던 알렉산더 대왕을 만났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알렉산더는 그에게 "당신이 요청하면 그게 무엇이든지 다 주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디오게네스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대왕이시여, 지금 햇빛을 가리고 있습니다. 좀 비켜주시겠어요?"

교환의 가치란 서로가 그 가치를 인정할 때에만 성립하는 것입니다. 흔히 '돈으로도 못 산다'라고 표현하는 가치들은, 보다 정확히 말하면 '돈'으로는 교환 가치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모든 것'을 주겠다는 알렉산더의 제안이 디오게네스에겐 한줌의 햇볕과도 견줄 수 없는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신들이 측정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상대를 평가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생텍쥐페리의 책 '어린 왕자'에도 어른들의 이런 '냉정한 잣대'가 등장합니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가에는 제라늄 꽃이 피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놀고 있는 아름다운 분홍빛의 벽돌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 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관심도 갖지 않는다.하지만 그들에게 '몇 십만 프랑짜리, 몇 평의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한다면 '아, 참 좋은 집이구나!'하고 감탄하며 소리친다. (앙투안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중)


***
오늘 본문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찾아와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합니다. 여기서 '표적'으로 번역된 헬라어 '세메이온(semeion)'은 징조, 기사, 기적, 이적, 표적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즉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요청한 것은 '만약 당신이 메시아라면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신비로운 기적을 보여라'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자유로이 이적(표적)을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도 당신을 '메시아'로 인정하겠다는 음흉한 의도를 감추고 있습니다. 이것이 숨겨둔 '교환 가치'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자신들이 '이해할만한 수준'에서 받아들이겠다는 이 태도는 오만하고 교만합니다. 만약 누군가 '나는 호랑이를 이해할 없으니 내 손 위에 호랑이를 올려달라'고 요청했다면 여러분은 그 질문속에 담긴 오만한 태도를 금새 눈치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을 자신들의 손바닥 위에 올려달라, 그러면 내가 믿어주겠다는 식의 태도를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하다고 질책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태복음 12:39)



이미 '표적'은 차고도 넘친다. 너희의 그 오만한 태도를 버린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 어떻게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지를 알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들려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향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보여라'라고 요청합니다. 교회는 그 말에 주눅이 들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씁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지적처럼 "교회는 설명되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상의 교회, 하나님 나라의 토대로서의 교회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를 통해 세상이 충분히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아쉽게도 최근의 통계는 그와 정반대의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쉬움이 '하나님에 대한 불충분'은 아닙니다.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아침마다 두손 모아 무릎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모든 성도들의 삶속에 여전히 기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