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BARR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mimnesko 2023. 2. 14. 09:58

- 마태복음 11:1~10

 

 

제가 아침에 매일성경의 순서를 따라 말씀 묵상을 나누는 이 메뉴의 이름이 미드바르(midbarr), 즉 '광야'란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텅 비고 아득히 넓은 뜰'을 뜻하는 이 '광야'라는 단어는 시어(詩語)나 노랫말에 사용되는 경우를 제외하곤 의외로 실생활에선 자주 접하기 어렵습니다. 황야, 벌판, 들판이라는 단어가 보편적입니다. 그런데 '광야'는 그 어감 상 '황야'와 다르고 또 '벌판'과도 다릅니다. 단순히 너른 땅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한 어떤 함의(含意)가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라고 묻습니다. 그저 단순히 '너른 땅', '척박하고 메마른 땅'으로 갔는지를 묻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밖에 만날 수 없고 또 광야에서밖에 볼 수 없는 '어떤 것'을 위해 사람들이 굳이 광야에 갔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의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출애굽기를 보면, 400년 동안 이집트의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의 열린 바닷길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땅으로 향하는 놀라운 여정을 보여줍니다. 400년 이면 무려 10세대의 기간입니다. 한 왕조가 흥망성세를 겪고도 남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40년이 채 못되는 일제강점기가 남긴 이 땅에 남긴 일본의 흔적들을 생각해 본다면, 10세대가 지나는 동안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신앙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뼛속 깊은 곳까지 이집트의 삶이 배어 있었을 것입니다. 생각의 깊은 곳까지 노예의 근성이 인박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홍해를 건너 기뻐하는 그 백성을 가장 먼저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텅 비고 아득히 넓은 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시키셨고 준비시키셨습니다.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인 줄 알았던 모세와 다른 모든 백성들은, 영원히 광야를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깊은 절망과 또 깊은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받았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예배를 경험했고,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의 제사를 경험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는 단순히 '너른 들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교회였고, 훈련의 마당이었으며 예배의 자리였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제자들에게 출애굽의 광야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더불어 예수님의 이 질문은, 우리의 갈피없는 삶속에 만나게 되는 그 '광야'를 떠올리게 합니다. 세상의 소망이 아득하게 끊어진 그 광야. 내가 가진 것, 이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모래처럼 사라지고 생존의 바닥부터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곳. 하나님의 개입 없이는 살 소망조차 희박한 곳.

어쩌면 그 광야는 혼잡한 출근길 버스나 지하철 안일 수도 있고 옥죄듯 조여오는 회사의 낯선 책상 앞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희망이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허황한 퇴근길일수도 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종종 광야의 한 복판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 거친 길을 걸어왔었구나, 돌아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여전히 그 너른 뜰 한 복판에 서있음을 깨닫게 될 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의 이 질문은 마치 아픈 환부를 헤치는 날카로운 칼처럼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