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BARR

검(儉)을 주러 왔노라

mimnesko 2023. 2. 13. 11:12

- 마태복음 10:34~42

 

 

"너 같은 것들은 가족이 제일 큰 가해자인데, 왜들 딴 데 와서 따질까?"

최근 화제가 되었던 넷플릭스의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고등학교 시절 학교 폭력의 주동자였던 연진이가 던진 한 마디 말입니다. 이 서슬퍼런 한 마디 말이 동은이에게 날아들 때, 그 속에 담긴 한 줌의 사실이 주인공뿐 아니라 시청자들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일말의 반성도 자책도 없는 가해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실제로 학교 폭력 등의 피해자들을 무너지게 하는 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2차 가해인 경우가 더 많다고 합니다. 믿었던 만큼 고통은 배가 될 수밖에 없겠지요. 그들을 버티게 하는 마지막 힘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본문의 이 말씀이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불화하게 하려 함"(35절)이라니....

그것도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서로 대립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비록 그 속에 한 줌의 진실이 담겼더라도 말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4)

 

열두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이 더욱 견고해지길 원하셨습니다. 예수님 어깨 너머로 참여했던 사역이 이제 자신들의 일이 되었습니다. 가장 든든한 방패가 사라진 채, 날아드는 세상의 돌과 화살을 온 몸으로 맞아야하는 상황에 놓이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혹독한 비난과 비판 앞에 서게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억울한 재판과 불공정한 판결의 희생자가 되어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으로 '보냄을 받는 일'이란 결코 말랑말랑하고 폭신한 일이 아님을 제자들에게 상기 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가장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수사'에 그치는 내용이 아니란 점입니다. 문자 그대로, 제자의 삶이란 다른 어떤 삶의 조건보다 복음전파가 우선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그 마지막은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각오입니다.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교회의 슬로건 중에 가장 흔한 단어인 '제자'. 교회마다 '제자 훈련', '제자반' 등등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삶을 강조하며 교육합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겠죠? 목숨을 각오하는 심정으로 살아야 한다는 거지 정말 목숨을 내놓으라는 말은 아니다. 그 정도의 각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도겠지요. 심지어 주어도 살짝 바뀌곤 합니다. '교회'를 위해 충성하면 복을 받는다, 라는 식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어디에도 그런 완곡함이나 왜곡은 등장하질 않습니다. 오히려 서슬퍼런 검을 손에 쥐고 이방의 땅을 향해 죽을 각오로 길을 떠나는 제자들의 모습만이 나타날 뿐입니다. 우리가 잃은 것은 '화평'이 아니라 어쩌면 '검'이 아니었을까요? 손에 든 검을 버리고 세상을 향해 '화평'만을 주장하는 완곡함과 왜곡이, 정작 우리가 디딘 바닥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차별해야 할 것에는 차별이 없고, 차별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는 지독하게 차별하는 우리의 모습이, 그 신앙이 정작 묵숨을 잃고도 교회를 무너뜨리는 어리석음이 되지는 않을까요? 

제자들을 이리 떼에게, 늑대 들에게 보내는 듯한 애절한 예수님의 마음은 제자들을 향한 마지막 당부에서 더욱 사무칩니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