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BARR

벼랑 끝

mimnesko 2023. 1. 26. 10:23

- 마태복음 5:1~12

 

 

삶이란 참 위태해서, 때때로 자신의 발끝이 벼랑의 가장자리에 놓여 있음을 확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일이 우리 삶에서 없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지만 삶이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우리를 날선 바람이 귀를 때리는 벼랑의 가장자리에 서게 할 때가 있습니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종종 '우물'이라는 은유로 이런 삶의 정황을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깊은 우물 속에 놓인 사람은 작은 동그라미의 하늘 위로 찰나같이 지나는 한줌의 태양을 그리워하며 살아갑니다. 동그라미 속 하늘은 그가 가진 세계의 전부입니다. 그 가장자리를 따라 해가 뜨고 계절이 지나갑니다. 대단히 거창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사람은 자신만의 동그란 하늘밖에는 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예가 없을 것 같습니다. 

 

지양과 지향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좁디 좁은 시선의 가장자리밖에 보지 못하는 우리의 위태한 삶을, 어느 시인의 아름다운 노래에는 마치 그의 시어 속 '눈'과 같이 소복하게 담은 바 있습니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죽이려고
산골로 찾아갔더니, 때아닌
단풍 같은 눈만 한없이 내려
마음 속 캄캄한 자물쇠로
점점 더 벼랑끝만 느꼈습니다.
벼랑끝만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가다가 꽃을 만나면
마음은
꽃망울 속으로 가라앉아
재와 함께 섞이고
벼랑끝만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 조정권 '벼랑끝' 전문

 

오늘 묵상의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시작이며 흔히 '팔복'으로 더 잘 알려진 본문입니다. 분명 여덟가지 '복'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의 '복'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서 누군가의 친절한 해석을 요청하게 되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그중 3절의 말씀이 더욱 그렇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걸까? 헬라어 원어를 찾고 또 아람어의 원어를 대조해 보아도 우리가 내심 원하는 그 '해석'을 좀처럼 만나기 어렵습니다. 이것을 '영적인 가난, 결핍'으로 번역하고 옮기는 것은 온당치 않아 보입니다. 영적인 가난과 결핍이 복이라는 해석은 하나님을 지나치게 가혹한 조련사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고갈을 기뻐하시는 분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의 결핍과 파산을 축복하시는 분일까요? 유진 피터슨의 "더 메시지(The Message)"는 이 본문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은 커진다.

 

저는 이 해석이 본문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난(그것이 영적이든 육적이든)과 결핍을 의도하거나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삶이 벼랑 끝으로 내몰릴때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며, 그 위태로운 발걸음에 동참하시는 분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를 벼랑 끝으로 내몬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일 때가 많습니다. 정직하게 돌아보면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작아짐이 오히려 복이 됩니다. 사회적 환경, 물적 토대라는 핑계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다스림을 경험합니다. 때문에 오늘 하루의 고단한 삶이 벼랑 끝만 바라보는 것 같을 지라도 우리에겐 여전히 소망이 있습니다. 깊은 우물 속에서 우리를 꺼내시며 나의 눈과 귀를 열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그 영원한 약속이 우리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