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BARR

나실인(Nazirite)은 누구일까?

mimnesko 2023. 1. 10. 11:15

- 민 6:1~12

 

성경을 읽다보면 종종 '나실인'이라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구약의 삼손이나 사무엘과 같은 사람들을 '나실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매일성경에서는 친절하게 나실인을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즉 레위인처럼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들이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도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나실인(Nazirite)의 히브리어 '나자르'의 뜻 자체가 '구별하다', '분리하다'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스스로가 어딘가로부터 구별되고 분리된 사람들이라는 의미인 셈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2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 (민 6:2)

 

 

나실인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었습니다. 그 예를 성경에서 찾기는 쉽지 않지만,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나실인의 서원'을 할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이 본문이 여성의 부정을 의심하는 '의심의 제물' 바로 뒤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성경은 종종 여성을 하나의 '소유물'처럼 다루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성경을 기록하던 사람들에게 내면화된 문화와 습관에 기인한 경우가 더 많은 듯 보이고 오히려 가감 수정이 쉽지 않았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여성은 남성과 '기회의 균등'이 아닌 '결과로서의 균등'을 제안받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실인의 서원'을 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미 구별된 사람들, 즉 레위 지파가 존재했고 그들을 통해 구별된 임무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는데 굳이 남성과 여성이 나실인이 되어 불편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 중 더욱 열심을 내어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원했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선택받은 믿족이지만, 더욱 열정적인 신앙으로 구별된 삶을 살고자 욕심내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욕심(?)이 좋은 결과를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경험상 종종 개인의 거룩한 '욕심'은 주변을 불편하게 하기도 합니다. 

 

교회나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스스로의 과한 신앙심을 무기로 주위 사람들을 재단하고 심판하며 거친 말들을 '권면'의 이름으로 쏟아내는 미성숙한 신앙인의 모습들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을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록 개인의 신앙에 따른 판단을 제한하거나 그 수위를 적절히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어느 개인이 얼토당토 않는 주장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면, 공동체는 그 내용의 허위를 밝혀내기 위해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소비해야만 합니다. 수백 만 명이 모여 있는 광야에서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또 과연 '레위 지파'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느냐? 왜 우리는 아니냐? 라고 말하는 사람이 하나둘 씩 생겨난다면 신앙 공동체의 분열은 피할 길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별한 서원'을 한 사람들의 시스템을 만드셨습니다. 성별에 관계없이, 나이의 많고 적음에도 상관없이 평생이든 단기간이든 신앙의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반드시 갖춰야 할 모습을 지정하셨습니다. 그것을 '구별된 사람' 즉 나실인이라고 말씀한 것이죠. 

 

1. 그들은 포도나무의 어떤 소산물도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술취함이나 먹거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빵을 발사믹 식초에 찍어 먹어서도 안 된다고 제한한 것은, 포도가 상징하는 풍요로움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급을 우선으로 살아가야 한다. 네 신앙을 무기로 사취해서는 안 된다. 네 열심을 근거로 강요해서는 안 된다. 네 신앙을 네 삶의 공급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가장 대중적인 것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된 삶을 결심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2. 그들은 머리에 삭도를 대어서는 안 됩니다.

머리를 잘라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긴 머리카락은 생명이자 화관이 됩니다. 제사장의 화관(네제르)이 나실인의 어원과 같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긴 머리로 스스로의 경건함을 드러내로 표시하게끔 합니다. 누구나 주목하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즉, 자신의 신앙에 배반하지 않는 삶을 살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실인'의 삶이 그 믿음과 떨어져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날마다 생명으로 머리카락을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에 감사하고 감격하기를 요청하셨습니다. 긴 머리를 가진 나실인일 수록 그 삶은 모본이 되어야 했습니다. 삼손조차 그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3. 그들은 시체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 죽음은 '죄의 결과'였습니다. 죄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요청은 '죄는 그 어떤 모양이라도 피하라'는 권면과 일치됩니다. 1% 가능성조차 배제하라는 것입니다. 의도치 않게 죽음을 경험하게 되더라도 그 대가는 가볍지 않았습니다. 속죄와 속건을 해야했습니다. 그전까지의 기간은 성경 표현대로 모두 '무효'가 되고 맙니다. 나의 경건의 깊이가 어떠하든지, 단 한 조각의 죄만 스쳐도 그 경건은 무효가 된다는 하나님의 기준은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습니다. 

 

요즘 우리 주위엔 스스로 '나실인'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것을 거룩함의 표시, 선택의 표시로 여기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스스로 나실인의 삶을 살겠다, 즉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결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과 거룩함의 '수취인'은 명확히 그 기준을 밝히고 있습니다. 거룩과 섬김은 자의적의 기준과 표현이 아닙니다. 스스로가 거룩하다, 말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거룩은 인간의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의무이며 분별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나실인의 경건함과 거룩함을 따라가는 삶을 목표로 해야합니다. 성경에서 수차례 반복되는 것처럼 거룩은 선택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초청되었다는 것은 거룩한 삶, 즉 구별되고 구분된 삶으로 초청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거룩한 의무를 기쁨으로 감당하는 고백이 우리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