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BOOK

일각수의 꿈

mimnesko 2014. 2. 24. 00:40

 

 

 

 

누군가 나에게 하루키 소설 중 한 권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상실의 시대'(원제는 노르웨이의 숲, 이지만 사실 한글제목이 훨씬 더 설득력 있다. 물론 하루키는 동의하지 않겠지.)를 추천해 주곤 했다.

개인적인 호감의 순위로 본다면 '상실의 시대'는 '코끼리 공장의 해피앤딩'보다 조금 앞선 순위이고, 'TV 피플'보단 조금 아래였다. 전체적으론 중간(확고하게 '댄스 댄스 댄스'가 중간을 차지한다)보단 좀 아래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실의 시대'를 선뜻 권하게 되는 것은 여러 의미에서 '상실의 시대'는 하루키를 이해하는 리트머스와도 같은 책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상당한 분량이다. 하루키는 완성도 높은 단편을 잘 쓰는 작가다. 그런데 한 번 길게 쓰기 시작하면 도대체 어디쯤에서 멈춰야 할 지를 잘 모르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길게 쓴다. 태엽감는 새가 그랬고, 최근의 1Q84가 그랬다. 그래서 '상실의 시대' 정도의 호흡을 읽어낼 수 있다면 하루키라는 작가를 조금은 좋아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소설은 마치 종합선물세트처럼 하루키의 모든 잡단한 것들이 그 소설엔 담겨있다. 사랑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숲속 어딘가의 우물 이야기로 초현실주의 하루키의 본색을 조금 드러내기도 한다. 무엇보다 '미도리'라는 전례없이 사랑스러운 캐릭터의 등장이 '상실의 시대'를 공전의 베스트 소설이 되게끔 했다. 그녀는 골프코스에 등장한 쌍둥이 같기도 하고, 손가락이 여섯 개였던 레코드샵의 점원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대부분의 종합선물세트가 늘 그렇듯, 그럴 듯한 포장에 종류만 많지 별로 실속은 없다.

 

***

 

내가 흔쾌히 첫 손가락에 꼽는 하루키의 소설은 '일각수의 꿈'(위의 사진과 같은 표지다. 최근 문학사상에서 양장판으로 출간되었는데 표지는 예전만 못하단 생각이 든다)이다. 최근의 1Q84가 상당힌 근접했지만, 사족 같던 3권 덕분에 역전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 뒤를 나란히 잇는 건 '해변의 카프카'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이다. 거의 20년 가까운 거리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소설은 묘하게 닮아 있다. 하나는 그를 '소설가'가 되게 해주었고, 다른 하나는 그를 '노벨문학상'에 이름이 오르내리게 해 주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하루키의 단편이 장편들보다 훨씬 더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오후의 잔디밭이 그렇고 태엽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 가 그랬다. 회전목마의 데드히트나 렉싱턴의 유령 같은 단편도 압축된 하루키 월드를 경험하게 해준다. 특히 백미는 '빵가게 습격'과 그의 후일담 같은 '빵가게 재습격'이다. '도대체 이게 뭐...야?' 싶은데도 묘한 설득력이 있다. 아마도 느닷없이 빵을 강탈당한 맥도널드 직원의 기분도 그랬겠지. "콜라는 안 돼! 빵만!" 부분에선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일각수의 꿈'의 특징 역시 두껍다는 것이다. 

하지만 첫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뭔지 모를 일들이 휙휙 지나간다. 브레인워시[각주:1]며 샤프링 시스템[각주:2]이며 하는 단어들이 아무렇게나 튀어 나오고 또 아무렇게나 흘러 간다. 기호사니 계산사니 또 야미쿠로니 하는 것들이 수두룩 하다. 신기한 것은 뭔지 모를 내용이지만 페이지는 훌훌 넘어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장의 힘인지 이야기의 힘인지는 구분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일각수의 꿈에서 하루키는 이야기를 끌어가는 비범함이 있다. '언더그라운드'를 읽어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다.

 

소설은 두 개의 이질의 세계가 서로 다른 선로에서 같은 역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처럼 상대를 향해 맹렬하게 속도를 낸다. 암시는 난무하지만 암시의 대상이 선명하지 않다. 은유는 있는데 원관념은 희박하다. 그래서 독자는 마치 일각수의 머리뼈를 들고 오래된 꿈을 읽는 것과도 같은 기분이 되고 만다. 달리의 초현실적인 그림 같기도 하고 프로이드의 난해한 꿈 같기도 하다. 비현실적인 내용이 너무나 생생하게 난무해서 마치 그것이 빨간 알약의 현실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러한 '초현실'의 세계가 하루키에겐 너무나도 평범한 풍경으로 그려진다. 예를 들자면 이런 부분,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나는 간단한 저녁식사를 만들었다. 우메보시를 갈아 그것으로 셀러드드레싱을 만들고, 정어리와 유부와 산마 튀김을 몇 개 만들고, 샐러리와 쇠고기찜을 준비했다. 만들어진 음식은 나쁘지 않았다. 시간이 남아서 나는 캔 맥주를 마시면서 데친 명아주 나물을 만들고, 깨를 버무린 강낭콩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침대에 누워, 로베르 카사드쉬가 모차르트의 콘체르토를 연주한 옛날 레코드를 들었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옛날 녹음으로 듣는 쪽이 훨씬 더 마음속 깊이 와닿는 듯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런 것도 물론 편견일지도 모른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문학사상 개정판, 158p)

 

마치 눈앞에 펼쳐진 듯 선명한 이미지의 묘사는 큰 덩어리의 비현실성을 슬며시 현실의 틈으로 비집어 넣는다.

상대는 도서관의 사서. 그녀는 질량보존의 법칙을 넘어서는 놀라운 소화력의 소유자로 등장한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비현실성이 난무하지만,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맥락에서 읽히고 설득력을 갖는다. 비교적 초기작에 속하는 '일각수의 꿈' 이후 하루키의 소설에서 위와 같은 풍경이 얼마나 많이 반복되었는지를 헤아리기 어렵다. 요리에 비범한 재능을 가진 남자들이 수두룩한 그의 소설 속에선 입시 학원의 수학 강사조차도 요리에 대한 나름의 식견과 이해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냉철한 보디가드로 등장하는 캐릭터(게다가 그는 한국인이다)조차도 음식에 대한 해박한 이해를 가지고 있을 정도이다.

 

 

 

 

 

 

 

 

  1. 문학사상의 최근 개정판에선 이 표현을 '세뇌'라고 점잖게 번역해 두었다. 덕분에 뭔가 근사하던 느낌의 작업이 평범한 계산사의 일과로 바뀌어 버린 기분이 들었다. '파파이스'를 '뽀빠이들'로 번역하던 시절의 향수가 느껴진다. 멍청하긴! [본문으로]
  2. 셔플링, 개정판에선 어색한 일본발음이 아닌 셔플링으로 옮겼다. 역시 처음의 신비감은 몽땅 사라져 버렸다. [본문으로]